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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주오씨 홈 > 유물과 유적 >해주오효동기적비

 

 

유물 유적

문양공(文襄公)

덕산사(德山祠)

덕산사 계생비

척경입비도

문양공 실기(實記)

고려조 삼군 금양단

2세 동정공 설단

성균진사 묘지석

필경재(必敬齋) 고문서

오괴정(五槐亭)

해주오효동기적비

 


해주오효동기적비(海州吳孝童紀蹟碑)


     


 아홉 살 어린 아들이 어머니를 욕(辱)보이려는 왜군을 온 몸으로 막다가 이 빗돌 아래 밭에서 모자(母子)가 함께 살해당하니 후손들이 이 아들을 효동(孝童)이라 부르고 이 밭을 효동밭이라 이르더니 속칭 쇠똥밭으로 수 백년 불리어 오다가 이젠 큰 도로가 되었다. 효동(孝童)의 휘(諱)는 전래되지 못하였으며 관(貫)은 해주(海州)요, 시조는 고려때 검교군기감감(檢校軍器監監)을 지낸 종인(宗寅)이다. 판사공(判事公) 환(環)은 효동(孝童)의 파조이고 낙남조(落南祖)인 돈암공(遯菴公) 양손(梁孫)은 고조요 목은공(木隱公) 강(綱)은 증조이며 경암공(敬菴公) 운준(雲駿)은 조부요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인 양정공(養靜公) 천민(天民)은 고(考)이다. 비(妣)는 숙인(淑人) 동복오씨(同福吳氏)로 아들 효동(孝童)과 함께 왜군에게 죽음을 당하니 무후(無後)하다. 제(弟)는 계비(繼妣) 숙인(淑人) 창원정씨(昌原丁氏)의 소생인 호군공(護軍公) 석윤(錫胤) 명윤(明胤) 창윤(昌胤) 중윤(重胤) 참의공(參議公) 흥윤(興胤)이다.
 때는 1597년 8월 18일 임진왜란의 2차 침입한 정유재란에 남원성이 함락되자 이 곳 말천방(秣川坊) 목지(木支) 마을에도 왜군의 노략질을 피할 수 없었다. 유림 등 마을 사람들은 멀리 피신을 한 가운데 효동(孝童)의 어머니 동복오씨(同福吳氏)는 와병중인 노시모(老媤母)를 봉양하며 배를 매다가 왜군에게 이곳 효동밭에 끌려나와 길을 안내하라 먹을 것을 달라 남정네들은 어디에 갔느냐고 다그치자 이를 모두 거절하여 물 한 모금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능욕(凌辱)을 보이려는 왜병의 팔을 물어 뜯고 몸을 어렵게 지키는데 이를 본 어린 효동(孝童)이 어머니를 감싸고 이에 적극 항거하여 울부짖다가 왜병의 총칼에 무참히 어머니와 같이 살육(殺戮)당하였다. 지나는 행인(行人)들이 두 시체를 수습하여 이 밭 윗편 산기슭에 나란히 묻어 주었으나 총망중에 좌우로 모자(母子)의 묘를 구분 못하여 지금까지 400여년을 내려오니 축문(祝文) 읽을 방향을 몰라 묘(墓)에서는 무축단헌(無祝單獻)으로 향화(香火)를 올리고 효동(孝童)은 동몽신위(童蒙神位)로 지위를 모셔오고 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아들을 못 낳는 사람이 이 효동산소와 그 주변에 있는 도강김씨(道康金氏)산소에 와서 벌초를 하거나 아들을 간절히 빌면 반드시 득남을 하였다 하며 최근까지도 아들을 비는 사람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해주오씨 문중의 정자로 지방문화재인 오괴정중건기(五槐亭重建記)를 보면 임진난 병화(兵火)에 오괴정(五槐亭)은 빈 터만 남고 회화나무와 유고서책(遺稿書冊)이 소실되었으니 후손들이 탄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 기록한 모든 사실들은 오씨문중에 면면히 구전(口傳)되어 왔으며 많은 어른들의 말씀과 해박한 증언으로 확인되었다. 오씨(吳氏)문중은 정유재란 이후로도 400년을 넘게 5홍7백이라는 교지를 받아오면서 충효의 정신을 이어 이 마을을 지켜오고 있다.
 아! 쇠똥밭을 지나는 넓은 도로야 물어보자
 원혼을 달래던 쇠똥밭 도깨비는 다 어디로 쫓았느냐
 어머니를 안고 외치던 효동의 절규는 어느 바람에 실었느냐
 왜병의 살을 한입 베어 물어 몸을 지키던 동복오씨의 열(烈)과 충(忠)은 어디에 묻었더냐
 충(忠) 효(孝) 열(烈)이 따로 있을까
 우리 후손들의 가슴에 두 떨기 꽃으로 그 정신 받들고 실사(實事)를 기록하여 이 빗돌을 세워 추모(追慕)하노니
 영(靈)이시여 풍차운마(風車雲馬)로 오(吳)씨 산의 갈피에 들리시어 쇠똥밭 효동(孝童)의 모자(母子)를 자애롭게 굽어 보소서

2009년 3 월 일
소은(小隱)오종식(吳鍾植)삼가씀
기적비건립 해주오씨판사공파대종회